최근 중고거래 앱에 차량용 가로바와 풋을 올렸다. 얼마 뒤 구매 희망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본인 차량에 맞는지 확신이 없으니, 현장에서 직접 장착해 보고 맞으면 거래를 확정해도 되냐는 내용이었다.
말투만 보면 전혀 무례하지 않았다.
"가능하실까요?”,
“불편하시면 이만하겠습니다.”
조심스럽고 정중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대화를 이어갈수록 묘한 피로감과 불쾌감이 밀려왔다.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다. 예의 바른 포장지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이기적인 거래 구조 때문이다.
이 대화에서 느낀 불쾌감의 본질은 다음 세 가지다.
1.
중고 거래에서 물건의 호환성을 확인하는 것은 온전히 구매자가 감수해야 할 리스크다. 사양을 찾아보고 치수를 비교하며, 그래도 100% 확신이 안 서면 본인의 판단하에 리스크를 안고 구매하는 것이 정상적인 거래 구조다.
하지만 “현장에서 장착해 보고 맞으면 사겠다”는 제안은 이 구조를 비튼다. 본인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과정(시간과 노력)을 생략한 채, 판매자인 나의 물건과 시간을 이용해 그 리스크를 줄여보겠다는 뜻이다. 식당에 가서 “한 입 먹어보고 제 입맛에 맞으면 결제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기 리스크를 남의 자원으로 ‘외주화’하려는 인지적 게으름이다.
2.
내가 그 방식에 부담을 표하자, 상대는 “확인비를 별도로 드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돈을 더 주겠다고 하니 합리적인 제안처럼 보일 수 있지만, 불쾌함은 가시지 않았다.
내가 거래 테이블에 올린 것은 ‘가로바와 풋’이라는 물건이지, 내 개인 시간과 현장 대응이라는 ‘노동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확인비가 1만 원이든 5만 원이든 본질은 같다. 상대가 팔겠다고 한 적 없는 것을 끌어와 “돈을 줄 테니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게다가 이미 한 차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그것이 자신의 리스크를 외부로 떠넘기기 위해 조건을 완화(비용 제시)하며 재차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다.
3.
상대는 대화 후반, 내게 챗GPT의 답변 캡처 화면을 무기처럼 들이밀었다. 제조사의 공식 제원이나 물리적 수치 확인은 건너뛴 채, 대충 물어본 AI의 “호환 가능성이 높다”는 일반론을 앞세워 묘한 압박을 가한 것이다.
결국 이 억지가 통하지 않자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정 불편하시다면 이만하겠습니다."
물러나는 척하지만 이 문장은 꽤 교활하다. 본인이 남의 자원을 무리하게 갉아먹으려 한 원인 제공자임에도, 거래 무산의 책임을 ‘작은 편의조차 봐주지 않는 예민한 판매자’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전형적인 수동공격(Passive-Aggressiveness)이다.
보이지 않던 구조가 보이기 시작할 때
과거 직장인이던 시절에는 이런 요청을 그저 ‘조심스러운 부탁’ 정도로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하고 매일같이 이해관계를 조율하다 보니, 타인의 화법 이면에 숨겨진 구조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쉽게 말이다.
누가 자기 리스크를 스스로 지는지.
누가 자기 문제를 남의 시간으로 해결하려 하는지.
누가 정중한 말투로 비용을 밖으로 밀어내는지.
아이들에게도 이런 감각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성적보다, 실제 사회에서는 이런 구조를 꿰뚫어 보는 판단력이 훨씬 더 중요한 생존 무기가 된다.
내가 하는 부탁이 정말 정당한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의 시간을 은연중에 훔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것들을 모르면 예의 바르게 말하면서도 한없이 무례한 사람이 되고 만다.
정중한 말투가 '이기적인 제안'을 '합리적인 제안'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내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남의 시간과 수고를 끌어오지 말 것.
아무리 부드러운 말로 포장해도, 명백한 착취이자 이기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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