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신호가 바뀐 걸 뒤늦게 알아차린 어떤 차가, 어정쩡하게 횡단보도를 가로막고 서 있었습니다. 그 차를 지나던 한 어르신은 운전자에게 몹시 기분 나쁘다는 듯 계속 노려보기만 하더군요.
물론,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인 횡단보도에 차가 서 있다는 건 분명 좋은 행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운전자를 비난하고 싶다면, 먼저 상황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예컨대, 운전자가 핸드폰을 보다가 그랬을 수도 있고, 앞차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을 수도 있죠. 혹은 신호가 바뀌었는지 모르고 빨리 출발하려다 정지선을 넘어간 것일 수도 있으며, 보행신호가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은 분명 있지만, 잘못의 정도나 비난받을 책임이 얼마만큼인지 평가하려면 구체적인 정황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고속도로에서 난폭 운전을 일삼은 사람과, 휴게소에서 노부부가 타지 못한 걸 뒤늦게 알아채고 그분들을 태우기 위해 급히 과속한 버스 기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두 사례 모두 ‘과속’이라는 같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대중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왜냐하면 의도와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어떻게 해서 그 차량이 횡단보도 위에 서 있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전자 입장이 이런 상황이었을 텐데, 저 어르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화만 내고 있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죠.
결국, 어떤 잘못이 벌어졌을 때 ‘잘못이냐 아니냐’라는 이분법적 판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잘못의 정도나 의도는 다양하고, 이를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비난은 또 다른 잘못을 낳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럼 저 행동이 잘했다는 말이냐?”라며 버럭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반응이 과하다”라는 상대방의 지적이 마치 “위법 여부를 따져보니 문제될 게 없다”인 것처럼 곡해하는 오류입니다. 실제로는 “잘못이긴 하지만, 그 정도를 고려해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런 주장을 “내가 했던 (격한) 반응이 옳았다”고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동의 잘못 여부’와 ‘반응의 적절성’은 다른 문제입니다. 상황과 의도를 살피고, 거기에 맞는 대응을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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